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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잡식성/Y] 이스탄불의 사생아 - 엘리프 샤팍 (2018.04.03)

Jyevi 2021. 8. 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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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탄불의 사생아] 엘리프 샤팍    

 

 

이스탄불의 사생아

터키에서라면 잃어버린 정체성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을 거야!터키문학의 양심 엘리프 샤팍의 『이스탄불의 사생아』. 기억과 망각, 이슬람과 기독교, 터키와 아르메니아, 동양과 서양의 뒤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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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야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담배를 내밀자 놀랐지만, 어머니가 거의 표면까지 감정을 드러낸 것을 보고는 한층 더 놀랐다.

그녀는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어머니의 담배에도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연기가 둘 사이를 구불거리며 올라갈 때 이 모녀는 서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각도와 그 조명에서 둘은 정말이지 비슷해 보였다.

한 사람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과거에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스스로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과거에서 빚어진 두 얼굴이었다. 


                              


 

 


저번 내 이름은 피라예에 이어, 터키 여행에 가기 위해 읽었던 책입니다.

제목이 이스탄불의 사생아, 라길래 저는 뭔가 정치나 문화적 의미의 사생아를 나타내는 줄 알았더니 이스탄불에 사는 사생아, 라는 뜻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사생아'인 10대 소녀 같다가도, 그녀가 같이 사는 가족의 막내딸인 것 같기도 하며 오락가락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결국은 하나로 합쳐집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소설인 내 이름은 피라예보다 재밌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반전이 있었어서 욕을 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한 줄 평은?   10대소녀의 내 생각보다 강한 방황과  엄청나게 뒤통수인 아버지의 정체 


 

첫 시작은 10대 소녀가 비를 맞는 장면입니다. 바로 젤리하.

그녀는 18살에 강간당해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중절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돌아와 가족들에게 아이를 낳겠다,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4녀 1남 중 4째 딸인지라 결국 온 가족이 젤리하의 딸, 아이샤를 공동 육아합니다.

젤리하가 워낙 어릴 때 아이를 낳기도 했고, 아이샤에게는 엄마 같은 이모가 3명이나 있고 외할머니까지 있어 아버지가 없이도 사랑받은 아이로 자랍니다.

그리고, 아마누쉬가 등장합니다. 아마누쉬는 미국태생이지만 가족의 배경이 아르메니아입니다.

 

 

 

 

 

아르메니아는 터키와는 독특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스만제국 시절, 아르메니아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대한 응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오스만제국과 자신들을 연결되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학생 때 이 지역에 있던 오스만제국이라고 배우지, 오스만의 후예라고 배우지 않습니다. (후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여기서 이미 작가가 단순히 두 10대 소녀를 랜덤으로 만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아마누쉬 또한 대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이 둘은 방을 함께 쓰면서 유대를 쌓아갑니다.

아마누쉬의 계부는 터키인인 지라 가족에게는 계부의 가족을 만나고 싶다, 라는 이유로 터키로 와서 지내지만  사실, 자신의 친척들이 터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터키로 왔습니다.

자, 여기서 왜 아이샤와 아마누쉬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냐 하면, 아마누쉬의 계부, 무스타파는 바로 젤리하 가족의 소중한 외아들입니다. 따지면 둘은 친척인 거죠.

 

 

 

아마누쉬는 이쪽 가족에게는 미국에 있다, 이쪽 가족에게는 이스탄불 친척 집에 있다 등의 여러 거짓말을 하다 결국 들켜서 무스타파와 그의 아내이자 아마누쉬의 엄마 로즈는 이스탄불로 날아옵니다.

무스타파는 사실 도망치듯 가족의 품에서 도망갔죠.

예전에, 젤리하가 임신했을 때 그녀의 언니 중 영매인 바누는 자신의 어깨에 있는 두 영마에게 아이의 아버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에 빠졌지만 가족들을 위해 비밀에 부쳤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눈치챈 무스타파는 바누에게 그것을 물어보고, 바누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내용이 스포가 될 수 있어 숨겨두었으니 궁금하면 눌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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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타파가 어릴 적, 그는 유일한 외아들로서 좀 건방지고 철이 없게 자랍니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가족의 떠받듬 을 받고 자랐습니다.

다들 그에게 한 수 져주지만 '젤리하'만큼은 절대 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터키의 정숙한 여인들 답지 않게 짧은 치마와 노출 있는 옷들, 높은 하이힐을 자주 신고 강렬한 언사와 행동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무스타파는 그런 그녀에게 훈계를 하지만 당연히 젤리하는 남자인 거 말고는 잘난 거 없는 네가 뭔데 참견이냐를 시전했습니다.

화가는 무스타파는 홧김에 그녀를 범합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이스탄불을 떠납니다.

이런 확. 말도 안 되는. 무슨 이런 미친 가족이 다 있어, 가 제 진짜 한 줄 평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게 된 무스타파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여 그들의 가문, 카잔지 가문의 저주를 완성합니다.

(카잔지 가문에는 남자들이 죽어 나가는 저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여자만이 남는 가정의 형태를 가집니다)





이 이야기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전체 스토리는 이러합니다.

소설을 쓴 작가는 이 책을 미국과 터키에 양쪽으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당시 터키 사회에는 큰 반향이 일고 터키는 그녀가 터키를 모욕했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녀는 책에서 당시에도 강하던 가부장적 문화를 직선적으로 비판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들, 여성들이 받는 억압 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여행 갔을 때는 그런 분위기를 많이 못 느끼기는 했습니다. 길에서만 봐도,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서서 담배를 피고, 남자가 아이의 유모차를 끌고, 종교적 이유로 히잡을 쓰는 여자들도 있었지만 안 쓰는 여자들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여행객이었으며, 현지인 친구와 함께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터키 여행하며 기념품으로 터키어로 된 책을 현지에서 사 오고 싶어서 이 책에 대해 친구에게 물어보며 살 수 있겠느냐 라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바로 알은체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모르는 책이긴 해도 그 사람들에게는 이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책이었던 거죠.

제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터키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관계 또한 조명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부터 대한민국까지 우리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모든 역사를 다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지만 터키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인이 다 '터키'사람인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르메니아 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아르메니아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겨 강제 이주를 당했고 그럼으로 우리는 가난해 졌으니 마땅한 대우를 해달라, 라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이스탄불을 여행할 때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친구가 한 집을 가르키며 '저기 붉은 집 보이지? 저 집이 아르메니아인이 살았던 곳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 라고 물었더니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살던 집은 붉은색으로 지어 사람들이 알게 했다고 합니다. 

 

 

터키는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는데, 아르메니아인의 이야기를 듣는데 이들 또한 우리와 비슷하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어느 쪽이 잘했다고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구별 당하고, 차별당하고, 같은 민족 내에서 성별로 또다시 차별하는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국 우리는 다 비슷한 모양으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구나 라는 걸 느꼈습니다. 나만 특별히 상처받고 나만 특별히 아프지 않다는 것이죠.

소설 속에서도 나오는데,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문화는 굉장히 비슷합니다. 문화적 형태, 주로 먹는 식재료, 음식, 전통 등이 굉장히 유사합니다. 그래서 아이샤의 가족은 자신들이 만드는 전통 음식들을 '미국인'인 아마누쉬가 아는 것에 놀라워 하고, 아마누쉬는 아르메니아인인 자신이 이런 음식들을 아는 것에 대해 아이샤 가족들이 놀라는 것에 당황합니다.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다름을 크게 인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책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터키에 있는 가부장적 문화였겠지요. 하지만 저는 터키 사람도 아니고, 아르메니아사람도 아닙니다. 가부장적 문화가 있는 나라에 살지만 우리 집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서 이해는 되지만 깊이 공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느낀 게 없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터키와 아르메니아, 여자와 남자, 가부장적 문화들 모두 다름을 인식하고 억압/고통이 진행된 케이스니까요. 단지 하나 다른데 크게 다른 것 처럼 느껴, 나에게 마치 해를 가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당연한 생존본능이지만 경계만 하는 것과 차별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사회적 분위기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 옆에서 일어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차별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바꾸면 내 옆 사람이 그 옆 사람에게, 그 옆 사람에게 바꾸다 보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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