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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잡식성/Y] 근대사 소설을 좋아하는 당신에게 : 칼과 혀 - 권정현 (2020.03.31)

Jyevi 2021. 4. 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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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과 혀] 권정현    

 

나는 머리맡에서 비린내를 풍기는 통나무 도마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것을 버리고 왔어야 했다. 피로 얼룩진 눈앞의 저 낡은 도마를.

수 많은 영혼들이 칼날에 베여 안감힘을 쓰며 제 죽음을 밀어내던 저 분노의 순간들을.

대륙으로 폭풍처럼 짓쳐들어오는 제국주의자들의 총검과 피바람, 죽어가는 자들의 한숨이 압착된 저 도마를 말이다.

나는 도마 위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다 누군가의 혀를 만족시킬 재료들이나 다름없다. 

내가 과연 저 날카로운 광풍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을까?


                              


 

 

혼불문학상을 받은 소설 칼과 혀.일본의 항복이 코앞에 남은 시기를 배경으로 둔 소설입니다.

시작은 마치 요리소설인것 처럼 하지만 결국 요리 라는 매개체로 수없이 얽히고 부딪히는 인물들의 치열하고도 처참한 인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줄 평은?  내 인생의 도마에는 무엇이 올라가 있을까. 혹은 나는 어떤 도마에 올라앉아있는 걸까. 


 

사실, 칼은 소설에서 워낙 자주 등장하고 어떠한 '폭력', 혹은 '멋짐' 이라는 대명사로도 자주 쓰입니다.

하지만 혀? 혀는 염두에 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왜 혀일까, 말하는 것때문일까. 라는 생각에 집어 든 책 안에는 요리를 이야기 하기 위한 '혀'가 매개체로 나옵니다.

도마위에 엎드린 나, 생각만 해도 섬칫한 표현입니다.

엎드린 채 먹히기 위한 재료로 쓰일 뿐이라는 말. 요리사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감상적이며 두려운 말입니다.

시기가 시기 인 만큼, 자신도 어떠한 희생양이 될거라는 의미 심장한 말이니까요.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사실 죽음에서 왔습니다.

파릇하게 자라고 있던 채소를 잘라 죽임으로 우리가 먹게 되는 것이며가축의 피를 보고,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알을 깨어 먹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들을 모아 먹음으로 살아갑니다.

전쟁은 마치 그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죽음을 모아 먹어 몸을 키웁니다.

요리는 사실 전쟁과 같은 말인 걸까요.둘 다 오직 행위의 주체자에게만 삶을 선사합니다.

 

다만, 요리는 죽음들을 모아 만들어 우리를 살게 하지만 전쟁은 과연 우리를 살게 할까요.

우리가 이긴다고 해도 우리가 살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마치 길순이 오타조의 마지막 길에 선사한 요리처럼 독이 든 요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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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심인물은 중국 출신 요리사 첸, 일본출신 관동군 사령관 오토조, 조선출신 위안부 길순 입니다.

이야기는 첸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첸의 아버지는 위대한 요리사였고, 그는 그 아버지에게서 커다란 도마를 물려받았습니다.

본래 요리사라는 직업 외에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데에 뜻이 없었으나, 우연히 위안부로 끌려왔던 조선여자 '길순'을 구해주며 노모와 함께 도망치다 자경대원이 됩니다.

그는 일본군 식당의 요리사가 되고 그곳에서 미식사 사령관 '오토조'의 혀를 만족시키며 신임을 얻게 됩니다.

첸은 요리사라는 그의 직업을 이용해 혁명을 실행하기로 합니다.

자랑스러워 마지많은 요리로 사령관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총칼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만의 싸움을 하기로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혀를 잘리며 노예처럼 묶여 주방에서 일하게 됩니다.


사실 오토조는 전쟁에 관심있는 사령관이 아닌, 예술과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전쟁은 사람의 소질이나 자질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삼키기 마련입니다.

그는 첸과 길순이 쓰러뜨려야 하는 제국주의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교양있는 체 하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전쟁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사람일 뿐이나, 스스로 그리고 주변에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 전쟁만 끝난다면 평화롭게 살 사람, 예술과 요리에 일가견있는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 행동합니다.

첸의 암살시도, 길순의 시도에도 살아남는 그는 끈질긴 지배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투쟁하는 첸과 길순은 점점 망가지는 반면, 오토조는 잘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결국 조선여자, 길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길순은 일자리 소개에 속아 필리핀의 위안부로 팔려갔다 극적으로 탈출해 중국에서 첸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의 오빠는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자였지만,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독립의 열망에 취해 스스로 떳떳하지 않으면서도 동생에게 끝까지 희생을 강요합니다. 길순은 첸의 암실시도 실패로 고문을 당하지만 결국 '남자'들의 바램대로 오토조의 위안부가 됩니다. 기회를 잡은 길순을 결국 '혀'를 잘라내고 도망갑니다.

 


 

책에서는 지속해서 '혀'가 나옵니다.음식을 만드는 요리사 에게 중요한 '혀'.음식을 탐하는 미식가에게 중요한 '혀'.하지만 요리사 첸은 미식가 오토조에게 '혀'가 잘리고 미식가 오토조는 길순에게 '혀'가 잘립니다.'혀'가 온전한 것은 오직 요리에 집착하지 않은 길순 뿐입니다.

 

혀가 잘린다, 는 어떤 의미 일까요.당신들이 죽음을 먹는 댓가로 당신의 즐거움을 빼앗가 가기 위함일까요.

 

결국 모든 등장인물들이 원했던 '오토조'의 죽음은 길순이 선사합니다.모두가 꿈꿨던 잔인하고 화려한, 상징적인 죽음이 아닌 고요하고 평화로운 죽음.이로서 지배층의 정점에 있던 오토조 또한 '재료 로서 도마 위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칼과 혀는 결국 같은 집합 안에 있는 단어 일지도 모릅니다.생명을 뺏는 칼과, 죽음을 먹는 혀.먹음으로서 '주체'를 살리는 혀와 그 혀의 주체를 살리기 위해 '요리'하는 칼.

 

세치 혀로 전쟁이 날 수 있듯이, 칼부림 하나로도 전쟁이 날 수 있습니다.훌륭한 혀를 가진 요리사가 극적인 화해 혹은 평안을 줄수 있듯이, 칼질로 훌륭한 요리를 만 들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은 뗄레야 뗄수 없는 긴 역사를 서로 먹고 먹히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세나라의 이야기를 진부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써내려가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문장 하나 하나에서 작가의 고심과 고증의 노력이 빛을 발합니다.근대사소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있었던 불타는 사랑이야기, 뜨거운 우정이야기, 끈끈한 가족애 이야기.. 하지만 요리에 빗대어 각각 다른 나라 출신의 인물들을 엮고 갈등을 빗어내 마침내 안식하게 하는 이 이야기는 꼭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위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도마위에 올려 살아 남았다는 것을.

 

 

 

칼과 혀

한중일 세 나라가 ‘세상에 없는 요리’로 맞서다! 7년 만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흩어진 독자들을 분명 다시 모을 수 있는 작품!”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칼과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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